靑谷 2012. 12. 5. 14:04

남원 교룡산(蛟龍山)

일자; 2012124() 날씨; 구름조금

 

1. 산명; 복덕봉(福德峰)484.4m~교룡산(蛟龍山)518.9m

2. 위치; 전라남도 남원시 산곡동 교룡산 선국사주차장

3. 인원; 마눌과 함께

 

4. 차량이동;

13:30 혼불문학관(남원 사매면 노송리)남원 사매교룡산국민광광지13:45 교룡산 선국사주차장 도착

차량이동시간; 00시간15

차량이동거리; 14km<17,808km17,822km>

 

▼ 남원 교룡산 트랙지도



5. 산행코스; 원점회귀

13:55 선국사주차장13:58 성문/교룡산장14:00 교룡산성성벽오름14:16 능선길14:26 삼거리14:30 복덕봉(福德峰)484.4m(삼각점) 14:36 다시 삼거리14:38 안부갈림길14:45 교룡산삼거리14:47 교룡산(蛟龍山)518.9m(밀덕봉.통신탑)14:57 이정표15:09 은적암터.덕밀암터가는길(이정표)15:11 교룡산성 군기터15:13 선국사15:20 교룡산장15:20 성문15:22 선국사주차장 도착

산행시간; 1시간27

산행거리; 2.9km(도상거리)

 

6. 트랙 2012-12-04 남원 교룡산(2.9km원점).gpx



▼ 남원 교룡산 산행지도


▼ 남원 교룡산 10만 지도





 

군왕지지의 터, 남원 교룡산

남원 교룡산 지형도를 보면 마치 황용의 알처럼 둥글다.

 

남원의 서쪽 산줄기에 해당하는 교룡산에 대한 글을 시작하면서 어째서 남원고을의 지명 중에 유독 용자(龍字)가 많이 들어가는지가 궁금했다.남원지(조성교) 1장 연혁을 보면, “온조왕이 처음에 하남 위례성을 수도로 서기전 18년에 백제를 건국하자 미구에 우리고장은 고룡군(古龍郡)이라고 명명되었다라고 말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남원군은 전라북도 5, 13군의 하나로 본래 백제의 고룡군(古龍郡)인데라고 밝혔다.위키백과사전에는, “가야의 기문(己汶)지방의 일부인 하기물(下奇物), 백제의 고룡군(古龍郡)이다. 기물과 고룡이라는 이름은 서로 연관이 있다고 여겨지는데 용()의 순 우리말이 '미르'이므로 둘 다 '고밀Komir'로 개연되기 때문이다. 기문지방은 우륵의 12곡에 나오는 남원시내의 하기물과 지금의 남원시 운봉읍의 옛모산현, 또는 장수군 번암면의 거사물현에 있던 상기물 지역으로 후기 가야세력이 호남 동부지역까지 진출했음을 시사한다. 남원이라는 이름은 통일신라시대에 남원소경의 설치 이후이다.“라고 말 하면서 ”6세기 전반 백제와 가야연맹이 기문지방을 놓고 충돌하였다. 무령왕에 의해 백제는 하기물을 병탄해 고룡군을 설치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요천 금암봉에서 본 교룡산 전경

 

위 기록들을 보면 용자(龍字)가 들어간 남원의 지명은 백제 때 처음 등장한다. 그렇다면 예부터 풍수에서 말하는 군왕지지 혈이 있다고 전해지는 교룡산의 지명역시 남원의 옛지명인 고룡에서 유래된 것은 아닐까 싶다. 혹은 교룡산 지명이 먼저 생겼나서 교룡산 산명(山名)을 차용해 음이 비슷한 고룡으로 지역이름을 삼은 것은 아닐까. 하여간 용자가 들어간 남원의 교룡산은 범상치 않은게 확실하다. 물론 풍수에서는 산줄기를 용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고룡과 교룡은 너무나 가까운 어감을 갖고 있다. 교룡산에 깃든 명혈에 대해 각종 자료들을 통해 그 내용을 조명해 보자. 먼저호남의 풍수(백형모)남원은 일찍이 통일신라에서 95소경의 하나였던 남원소경을 두어 전라도를 관할하는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조선 태종때에는 남원도호부가 설치됐는데, 그 관할 구역이 담양과 순청을 바롯 임실, 곡성, 무주, 진안, 옥과, 창평, 장수 등 119현에 이를 정도로 광활했다. 이 같은 위상 뒤에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엄청난 대혈이 남원에서 그 힘을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묵과할 수 없다.

 

그 첫째 대상이 바로 남원을 감싸고 있는 교룡산(蛟龍山)과 산성터다. 각종 비기에 의하면이곳에 있는 명당은 금혈지지라 하여 간단히 논할 수 없다고 적고 있다. 천기누설에 해당한다는 금혈의 땅, 바로 이곳은 국왕이 태어날 수 있는 군왕지지(君王之地)라는 뜻이다. 그 명혈의 가치를 입증하듯 교룡산 아랫자락은 지금도 왕정동(王亭洞)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남원 시민들은 교룡산의 기운이 언젠가는 되살아 고을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다. 명혈지임을 감지한 듯 산의 정상부에 암자가 자리 잡고 있는데 지사들의 관찰에 의하면 실제의 명당지는 사찰 자리가 아닌 다른 쪽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전설적 군왕지지는 아직 임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라고 밝혔다.

 

노상준 선생도 <교룡산을 명산으로 가꾸자>(전라일보, 2008.02.03)라는 글에는 각종비기에 의하면 교룡산에 있는 명당은 금혈지지라 하여 간단히 논할 수 없다고 적고 있다. 천기누설에 해당한다는 금혈의 땅 바로 이곳은 국왕이나 성인이 태어날 수 있다는 군왕지지(君王之地)라는 뜻이다. 이러한 성산을 남원시민들이 다시 가꾸고 보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황용산(黃龍山)을 격하여 교룡산(蛟龍山)이라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라며, 교룡산 군왕지지 설에 힘을 보태고 있다.

 

최재은 선생도 <남원의 풍수지리를 풀어가기 위한 전제>(교룡산 주산 논에 부쳐)에서 교룡산이 남원의 지세에 끼친 영향이란 말로 표현할 수 조차 없을 만큼 크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교룡산의 중요성은 뺄래야 뺄수없을 것이다. 무려 수천 년 전의 서적인 산해경에서 조차 남원의 교룡산의 여우 닮은 괴물이 소개되고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나아가 한우물전설로 알려진 교룡승천지지인 임금이 나올 군왕의 터전을 갖추고 있는 교룡산이야 말로 남원을 남원답게 하는 산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남원의 진산은 교룡산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도 옛날분들은 그렇게 표기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객산(客山)이라고 표현하였다. 주인산이 아니라 손님산이라 표현하였다. 왜일까? 그것은 교룡산이 남원(용성관)으로 뻗어나간 어떤 산줄기도 없다. 또한 물을 넘은 어떤 흔적도 없다. 그러함에도 교룡산은 남원의 중요한 산이었으므로 이 산줄기에 고려시대에는 가장 중요한 사찰을 지었다. 바로 만복사이다. 그리고 토성을 쌓았다. 나아가 조선시대에는 이 산줄기에 향교를 지었고 나아가 사직단을 이 산줄기에 만들었다. 이렇듯 중요하지만 객산 이였다. 이러한 연유로 옛날부터 남원은 토백이 부자가 없고 외지인이 부를 누린다고 하였던 것이다.”라고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그런데 교룡산 자락에 있는, 현재 행정구역상 남원시 왕정동 10통 지역에 포함돼 있는, 화정동(서부 화정)에도 임금을 상징한다는 용의 승천과 관련한 전설이 깃든 우물도 전해지고 있다.왕정동주민썬터 누리집에 따르면 “1625년경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처음 이곳에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아 김씨 집성촌이다. 김해김씨가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을 때는 연화리(蓮花里)라 했다고 한다. 그러다 마을에 가뭄에도 변함없이 솟아나는 샘이 있어 마을 앞 논을 관개할 만큼 수량이 풍부하여 큰 우물이라는 뜻의 한우물로 불렀는데, 이 샘이 교룡산의 정기가 뭉쳐 솟아난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한우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뒤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대정리(大井里)라 하였다.”라고 밝혔는데, 남원문화원 사무국장을 지냈던 이석홍 선생은 <하늘이 내려준 샘물에 아비를 묻은 사연>에서 한우물 깃든 풍수설화를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교룡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대정마을, 이 마을에 아득한 옛날 후처와 아들 3형제를 둔 가난한 늙은 농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 마을에 도사가 찾아와 마을을 둘러 보다 이 우물을 보고 한 눈에 우물이 하늘이 내린 천하명당임을 알고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 마을을 다녔으나 모두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았다. 날은 저물고 갈 곳을 찾던 도사는 마지막으로 가난한 이 농부의 집에 들어가 하룻밤 묵을 것을 청하자 누추하지만 흔쾌히 반겨주는 가난한 늙은 농부의 마음에 감읍하여 천기를 누설해서라도 이 농부를 도와주리라 마음먹었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저녁상을 물린 도사는 늙은 농부를 조심스레 불러 말하기를, " 마을의 우물이 천하 명당인데 그 우물에 목을 베어 수장을 하면 3년 후에 발복하여 부귀를 누릴 것이다. 그러나 3년 안에 이 사실이 밝혀지면 큰 화를 당할 대명당이 틀림없다" 고 귀 뜸해주었다. 다음 날 아침 늙은 농부는 도사를 찾았으나 도사는 온데간데없고, 도사가 한 말만 귀에 맴돌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 늙은 농부가 죽을 때가 되어 부인과 아들 삼형제를 불러 놓고 도사가 귀 뜸해 준 대로 유언을 하였다.

 

착한 아들삼형제는 아버지 목을 베어 우물에 수장을 하고 장사를 지냈다. 그러고 3년이 가까워질 무렵 아들과 불화로 화가 난 계모가 마을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발설해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며칠을 걸려 우물을 퍼내자 앞발을 쳐들고 막 승천하려던 검은 암소가 울부짖으며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후 늙은 노인의 가족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우물에서는 귀곡성이 들리는 변고가 생겨 그치질 않자 무당을 불러 통한에 젖은 검은 암소의 한을 풀어주자 변고가 사라졌다. 그 후 우물을 메우고 그 옆에 다시 우물을 파 지금까지 보존해오면서 매년 정월대보름날 부녀자들이 남몰래 우물에 나와 불을 밝히고 소원을 비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한우물의 전설이 서린 우룡상

 

지금은 전설의 핵심인 용()이 되다 만 소()를 형상화 한 우룡상(牛龍像) 조각을 우물 정()자로 쌓아올린 기단에 올려놓았다. 우물의 가로길이는 259cm, 세로길이는 252cm, 높이는 52cm이다. 마을사람들은 매년 정월대보름날 이 우물에서 우물제를 지내고 칠월백중에 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백중놀이를 하는 풍습을 이어오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우물제를 지내는 것은 천하명당 하늘이 내린 이 마을의 우물에 아비의 목을 바친 아들의 슬픈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한우물의 전설을 읽고 뭔가 생각나는 게 없는가. 앞서 얘기 했지만 용은 임금의 상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룡산에 용이 승천하다는 대명당이 있다고 알려지면 당시 집권자들은 지은 죄가 없어도 불안감에 휩싸였을 것이고, 명당에서 출현할 용(새로운 군왕)을 어떻게든 견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여 전 남원문화원 노상준 원장이 말했던 '황용을 교룡으로 지명을 바꾼 것'은 아닐까 싶다. 거기다 한우물 전설도 아쉬움을 남게 한다. 그러나 아직도 교룡산에 대혈이 존재한다고 하니 남원출신 대통령(임금)의 출현은 여전히 유효하다.

 

 

교룡산성

지방기념물 제9호로서,  백제때 축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산기슭에서 정상까지 석축을 반듯하게 쌓은 교룡산성은 높이 4.5m, 길이 3,120m의 산성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2001년 현재 석축복원공사를 하고 있다.

  

 

 

남원시지에 의하면, 이성은 원래 4대문이었으나, ..북문은 사라지고, 동문인 홍예문 남아 있고, 동문 아래 고죽동에는 연산군때 무오사화를 이르켰던 유자광이 태어난 곳이다.

정유재란 당시 의병 1만여명이 산화한 성지라서 최근에 산 아래에 만인의총을 만들어 성역화 하였다.

또한 동학혁명 당시 김개남이 이 산성 안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전라좌도를 통솔했다고 한다.

 






▼ 13시55분 교룡산 선국사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성안으로 들어가 교룡산 정상까지 50분 정도 걸린다.


▼ 13시58분 성문을 통과하여 좌측으로 성곽을 타고 교룡산성을 한바퀴 돈다.


▼ 14시04분 교룡산성 성곽에서 뒤돌아본 풍경


▼ 14시15분 성곽길에서 남원시내와 덕유산 능선과 지리산


▼ 14시16분 가야할 복덕봉


▼ 14시26분 삼거리에서 복덕봉 다녀와서 교룡산 정상으로 이어간다.


▼ 14시30분 복덕봉 정상에서 교룡산


▼ 14시32분 복덕봉 정상에서 오전에 풍악산 노적봉하고 이어온 교룡산에서 바라본 풍악산 개동지맥 풍경


▼ 14시31분 복덕봉 정상에서 남원시내


▼ 14시32분 복덕봉 정상에서 동쪽 방향으로 ..


▼ 14시34분 복덕봉에서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가는길에서  교룡산.


▼ 14시38분 안부갈림길에서 직진하여 교룡산으로 이어간다.


▼ 14시45분 교룡산삼거리에서 교룡산 정상으로 향한다.


▼ 14시46분 교룡산(밀덕봉) 정상에 올라탄다. 정상에는 통신중계탑이있다.


▼ 14시47분 교룡산 정상 통신중계탑


▼ 14시48분 교룡산 정상에서 지나온 밀덕봉


▼ 14시51분 교룡산 능선길


▼ 14시57분 능선길 이정표에서 능선을 벗어나 성안으로 들어간다.


▼ 14시57분 성안으로 이어지는 계곡길


▼ 15시08분 은적암터 가는길


▼ 은적암터 풍경


▼ 15시11분 교룡산성 군기터


▼ 15시13분 선국사 칠층석탑


▼ 15시14분 선국사 대웅전


▼ 15시17분 성안


▼ 15시20분 교룡산장


▼ 15시20분 교룡산성


▼ 15시20분 비석


▼ 15시20분 성문


▼ 15시21분 성문을 벗어나 주차장으로 향한다.


▼ 15시21분 남원 교룡산성 안내문


▼ 15시22분 교룡산 선국사주차장에서 산행거리 2.9km 1시간27분 산행을 종료하고 부산으로 귀가길 오른다.




▼ 남원 교룡산 교룡산성 지도


▼ 남원 교룡산 등산 안내도


▼ 남원 교룡산 지도


▼ 남원 교룡산 풍악산 노적봉 지도 / 5만


▼ 남원 교룡산 풍악산 5만 지도

  

  

7. 차량이동(올 때);

15:30 선국사주차장교룡산국민관광지남원시15:45 남원T.G88올림픽고속도로16:14 함양J.C통영대전고속도로16:43 진주J.C남해고속도로(순천-부산) 동김해~부산1시간30분 정체17:20 진영휴게소(10)18:04 북부산T.G만덕터널18:50 동래 내성교차로(참소국밥 저녁식사30)19:35 자택도착

차량이동시간; 4시간05

차량왕복이동거리; 489km<선국사17,822km자택18,037km=215km>

 

8. 경비;

저녁식사(2) 12,000원 선국사 2,000

고속도로통행료(북부산서남원 9,900)(남원북부산8,700) 18,600원 휘발유소모489km 91,000

합계; 123,600

 

9. 특기사항

오늘 남원 비홍재~풍악산~노적봉~혼불문학관 산행이후 연결산행.

10. 작성일자; 2012125() 1215분 자택에서.........

11. 작성자; ********************913-12-90******************** 도시속의 野人 海廣


2012-12-04 ?? ???(2.9km??).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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