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水原) 화성(華城) 일주
일자; 2013년 5월 23일(목) 날씨; 맑음
1. 산명; 수원(水原) 화성(華城) 일주~팔달산(八達山)△146m~화성행궁(華城行宮)
2. 위치;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로즈모텔(화성 팔달문 부근)
3. 인원; 청노루 ※경기.인천.강원지역 3일차
4. 도보이동(갈 때);
♤08:05 수원 로즈모텔→도보이동→08:10 화성행궁주차장 도착
♤도보이동시간; 00시간 05분
♤도보이동거리; 0.5km
▼ 수원 화성 일주 트랙지도
5. 산행코스; 원점회귀
♤08:15 수원 화성행궁 주차장→08:20 화성행궁 성벽 오름→도로→08:30 정조대왕 동상→08:34 성벽→08:38 화서문(華西門)→08:50 장안문(長安門)→08:55 화홍문(華虹門)→북암문(暗門)<→방화수류정(東北角樓)>→09:08 동장대(東將臺)→09:12 동북 심돈(空心墩)→09:15 창룡문(蒼龍門)→09:28 봉돈(烽墩)→09:35 동남각루(角樓)→09:46 팔달문(八達門)→08:48 팔달산 성벽→10:03 서남암문(暗門)→10:11 팔달산(八達山)△146m(팔달산송신소)→10:20 화성문화유산 표석→10:25 서장대(西將臺)→10:34 서북각루(角樓)→10:37 화서문(성곽일주 약2시간)→도로→卍은정사 앞→신풍초등학교→10:55~11:30 화성행궁(華城行宮) 답사(35분)
♤산행시간; 3시간15분
♤산행거리; 11.4km
6. 트랙
▼ 수원 화성 일주 지도
▼ 수원 화성 10만 지도
수원(水原) 화성(華城)
화성(華城)은 1997년 12월 6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우리 민족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드날렸다.
화성은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임금이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신도시이다.(1794.01.정조19년에 시작 2년9개월 걸림) 화성의 전체 길이는 5.7km로 대부분 돌로 쌓았지만 일부 중요한 시설은 벽돌로 쌓았고 산성과 읍성을 합한 평산성이다. 화성을 출입하는 문은 4개로서 팔달문, 화서문, 장안문, 창룡문이며 이중 팔달문과 장안문은 남북이 정문으로 2층의 문루와 문을 보호하는 옹성이 문을 둘러싸고 있으며 팔달문과 화서문은 보물 402호, 40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조임금은 1752년 9월22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도세자이며 어머니는 헤경궁 홍씨이며 8세 때에 세손으로 책봉되었다. 11살때에 청원부원군 김사묵의 딸과 가례를 하고, 당쟁으로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읒ㄴ 모습을 지켜보던 나이도 11살 때였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왕위에 오르자 어진 성품을 바탕으로 정의롭게 나라를 다스리고자 노력했다.
또한 효성이 지극해서 아버지의 묘소도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옮기고 명복을 비는 절 용주사도 짓게했다.
어머니의 회갑잔치도 아버지의 묘소가 가까운 화성행궁에서 열어 드렸다.
▼ 08시15분 수원 화성행궁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화성행궁은 화성답사후 하기로하고 화성행궁 성벽으로 향한다.
▼ 08시20분 화성행궁 주차장에서 화성행궁 셩벽으로 오르면 10여분 이내 포장도로와 정조대왕 동상을 만난다.
▼ 08시27분 화성행궁 성벽에서 포장도로와 합류되어 3분 정도 진행하면 정조대왕 동상이다.
▼ 08시30분 정조대왕 동상에서 팔달산을 뒤로하고 화성 성곽을 따라 내려가면 화성 4대 성문 중 하나 화서문에 이른다.
▼ 08시34분 화성 성곽을 따라 화서문으로 향한다.
▼ 08시38분 화성 4대 성문 중 하나 화서문이다. 화서문에서 시작한 시계방향 성곽 일주은 약 2시간 후에 다시 돌아온다.
※ 화서문(華西門)은 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꺾이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홍예문 사이 좌우의 무사는 높이가 각각 18척이고 수문청은 문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1964년 9월 3일 보물 제 403호로 지정되었다.
▼ 08시49분 화성 성곽 장안문에 설치된 紅夷砲
※ 홍이포(紅夷砲)는 17세기 중국 명에서 네덜란드의 대포를 모방하여 만든 중국식 대포이다.
16세기 신항로 개척으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앞장서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지역에 진출하였다. 네덜란드도 동아시아 나라에까지 진출하였는데, 명은 17세기 초 네덜란드와 군사적으로 접촉하면서 그들이 사용하던 대포의 위력을 알게 되었다. 명은 이를 연구하여 직접 대포를 만들어냈는데, 당시 명이 네덜란드를 붉은 오랑캐, 즉 ‘홍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새로 개발한 대포를 ‘홍이포’라고 불렀다. 명과 후금 사이에 치러졌던 영원성 전투에서 홍이포가 큰 활약을 하였다. 명의 장군 원숭환이 2만의 군사와 10여 문의 홍이포로 누르하치가 이끄는 13만 기병에 맞섰고, 결국 누르하치가 사망하였다. 이후 후금에서도 홍이포를 얻고자 애를 썼다.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 때 홍이포를 가져와 사용하였고, 조선 인조 대에 홍이포를 정식으로 들여왔다.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인 벨테브레, 히아베르츠, 피아테르츠 등이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조선군에게 홍이포 제작법과 조종법을 가르쳤다.
▼ 08시50분 화성 4대 성문 중 하나 장안문이다.
4대 성문(장안문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
※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그러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2칸의 다포 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개의 적대가 설치되어 있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 시) 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 08시50분 화홍문이고 화홍문 밖으로 나가면 동북각루(방화수류정)을 만날수 있다.
※ 화홍문(華虹門)은 성의 북수문이다. 화홍문은 화성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수를 대비하여 수원천 북쪽에 세워진 수문이다.
1794년 (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하여 8월 3일에 상량이 이루어지고, 이듬해 1795년(정조 19년) 1월 13일 문루가 준공되었다. 북수문에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7개의 홍예문이 있고, 남수문과 달리 북수문 위에는 누각이 있다. 누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으로 하고 초익공(初翼工)의 겹처마이며, 지붕은 5량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누각을 설치해서 홍예에서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와 주변 환경이랑 잘 어우러져서 수원8경의 하나로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해 놓았다.
화홍문의 누각은 평상시에는 수문 및 교량으로서,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총안과 포혈을 갖추어 설계된 실용성이 있고 아름다운 외관이 조화된 화성 성곽의 대표적인 시설물 중 하나이다. 소요된 건축 비용은 30,940냥 4전 3푼으로, 장안문 및 팔달문 다음으로 많이 소요되었다.
※ 동북각루(東北角樓)는 화홍문 바로 옆에 있으며, 용연이라는 연못 위에 있다.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도 아름다워 '방화수류정'이라고도 한다. 1794년(정조 18년) 9월 4일에 공사 착수, 10월 7일에 상량했으며, 10월 19일에 완공했다. 2011년 3월 3일 보물 제 1709호로 지정되었다.
▼ 09시01분 화성 성곽을 따라 상쾌한 아침을 이어간다.
▼ 09시02분 화성 성곽길
▼ 09시07분 화성 성안과 공심돈
※ 공심돈(空心墩)은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지은 망루와 같은 곳이다. 남한산성에도 설치가 되어 있지만 성제상으로 돈의 내부가 비어 있도록 설계된 것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수원 화성이 처음이다. 중국의 병성인 '성서'(城書)에는 공심돈을 "벽돌로 3면에 섬돌을 쌓고 그 가운데를 비워 둔다. 가운데를 2층으로 구분하여 널빤지로 누(樓)를 만들고 나무사다리를 이용하여 위아래에 공안을 많이 뚫어서 바깥의 동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불랑기나 백자총들을 발사하여도 적으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이 어느 곳에서부터 날아오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 09시08부 동장대에 이르면서 잠시 휴식도 즐긴다.
※ 동장대(東將臺)는 성의 동쪽 동북공심돈과 동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795년(정조 19년) 7월 15일에 공사 착수, 8월 10일에 상량, 8월 25일에 장대 건물을 완공하였다.
이 장대의 지형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하게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동쪽 구릉인 선암산(仙巖山)의 요지이자 성중에서 지휘소를 설치하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3단으로 쌓은 대가 있고, 3층의 대에서는 총수(銃手)가 숨어서 쏘기에 편리하게 시설되어 있다. 한가운데 좌우에 와장대(臥長臺)를 설치하고, 흙을 판판하게 해서 돌로 깔아 하대에서 말을 타면서도 장대에 올라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장대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9칸의 익공식(翼工式) 단층의 팔작기와지붕이다. 건물 주변에는 터를 동서로 80보, 남북으로 240보로 넓이를 잡아 조련장(操鍊場), 일종의 훈련장 같은 것을 닦아 놓았다.
▼ 09시13분 동북공심돈으로 이어간다.
※ 창룡문(蒼龍門)은 성의 동문이다.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 복원하였다.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서남으로 행궁과 1,040보 떨어져 있고,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 높이 18척 5촌이며, 좌우의 와장대(臥長臺)는 길이가 각각 20척이고 돌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이다. 바깥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17척, 양쪽 선문 안은 쇠로써 빗장을 설치하였다.
▼ 09시14분 동북공심돈에서 화성 성안과 수원시가지 팔달산이 잘 조화롭게 어울려 돌아간다.
▼ 09시15분 화성 성안을 수원 시내버스 ..
▼ 09시28분 공돈을 지나 성곽 따라 동남각루로 이어간다.
※ 봉돈(烽墩)은 불을 비추어 행궁을 수비하고 성을 수비하며 주위를 정찰하여 사태를 알리는 군사 및 교통상의 신호 시설물이다. 봉돈은 화성 동문의 서남쪽에 있으며, 5개의 연기구멍을 갖추어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되었다. 1796년 (정조 20년) 6월 17일에 완공되었다.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키고 하층은 석축으로 쌓고, 위는 전축으로 성벽보다 높이 쌓아 위쪽에 여장을 두었다. 내부는 3층의 계단식으로 만들어서 가장 높은 곳에 5개의 횃불 구멍인 화두(火竇)를 설치하였다. 여장 3면에는 포혈 18개를, 그 아래 3면 벽성(甓城)에는 총안 18개와 누혈(漏穴) 1개를 뚫었다.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평상시에는 남쪽의 첫째 것에만 사용을 했다. 나머지 4개는 긴급한 일이 없으면 횃불을 들거나 연기나게 하지 않았다.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그리고 적과 접전시에는 5개의 봉화를 올렸다.
▼ 09시38분 화성 성곽에서 팔달문을 거쳐 가야할 팔달산 정상 송신소와 서장대을 바라본후 동남각루로 이어진다.
▼ 09시35분 동남각루에서 성곽을 따라 10여분 내려가면 팔달문을 만난다.
※ 각루(角樓)는 성곽 부분 가운데 높은 구릉을 택하여 누각 모양의 건물을 세워, 주위를 감시하고, 가끔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정자처럼 다기능성이 있는 건축물이다. 화성에는 동북각루, 서북각루, 동남각루와 서남각루 등 4개의 각루가 설치되어 있다.
▼ 09시35분 성곽 아래 수원천이 흐르고 팔달문 못미쳐 성곽이 잠시 끊어졌다 팔달문 지나면서 다시 이어지면서 팔달산 산정으로 향한다.
▼ 09시41분 수원천 건너 수원 시내에서 팔달문을 만난다.
※ 팔달문(八達門)은 화성의 남문으로,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현재는 좌우의 성벽이 헐려 길이 생기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번화가가 형성되었다. 축대 위로 누각이 서 있는데 2층으로 지어져 매우 높게 보인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옹성은 우리 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한양도성의 흥인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 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1964년 9월 3일 보물 제 402호로 지정되었다.
▼ 09시46분 도시의 발빠른 변화속에서 홀로 섬이 되어버린 팔달문을 뒤로하고 팔달산 정상으로 성벽 따라 오른다.
▼ 09시48분 도시의 발달로 끊어진 성벽이 여기서 다시 이어진다.
▼ 09시58분 화성 성벽을 따라 팔달산으로 오른다.
▼ 10시03분 서남암문에서 이르면서 팔달산 정상이 가까워진다. 이제부터 팔달산 능선을 따라 팔달산 정상과 서장대로 이어가 화서문으로 내려간다.
※ 암문(暗門)은 성 깊숙한 곳에 적이 찾지 못하도록 설치를 해서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일종의 비밀의 문이다. 화성에는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 남암문, 서남암문 등의 5개의 암문이 있다. 하지만 남암문은 그 지역이 시가지화되면서 인멸되고 지금은 미복원 상태이다.
▼ 10시04분 팔달산 주능선 팔달산송신소(팔달산 정상)와 기념탑.비가 숲에서 몸을 감춘다.
▼ 10시11분 팔달산 중앙부 쯤에 위치한 이정표
▼ 10시21분 효원의 종각을 지나 서장대로 이어간다.
▼ 10시22분 팔달산 능선 성곽길
▼ 10시23분 서장대와 서노대에 이른다.
※ 서장대(西將臺)는 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서 '화성장대(華城將臺)'라고도 불린다. 팔달산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1794년(정조 18년) 8월 11일 공사에 착수, 9월 16일에 상량하고, 9월 29일에 완공됐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장대에서는 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화성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하고, 그 자리에서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이다. 이 곳에는 장대석으로 대를 쌓고 세 벌의 계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다 또 한 단의 대를 놓고, 또 그 위에다 2층지붕의 건물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서 상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으로 되어 있다.
▼ 10시25분 서장대은 화성장대라고 표기되고 사용되기도 한다.
▼ 10시26분 서장대에서 화서문을 거쳐 가야할 화성행궁
※ 수원(水原) 나그네의 전설
조선 정조 때 전해 오는 이야기이다. 지극한 효심을 지녔던 정조대왕은 수시로 사도세자가 묻힌 능으로 행차를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미복차림으로 아무도 모르게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안녕리(지금의 수원이 조성되기 전까지 여기가 실제 수원이었다. 지금의 수원은 정조17년 1793년에 화성으로 이름 붙여지면서 시작되었다. 화성이 수원으로 바뀐 것은 고종 23년 1895년이었다.)로 암행을 하게 되었다.
그 때 마침 밭에서 일을 하던 농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에 대해 그 농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농부에게 능을 가리키며 저곳이 어떤 곳인가를 물은즉, 농부는 저곳은 뒤주대왕의 애기능이라고 대답하였다. 정치적 희생양으로 뒤주 속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지만 않았어도 왕이 되었을 사도세자의 능이라 뒤주대왕이라 했고, 애기능이라 한 건 임금님들의 산소를 능이라 하지만 왕이 못되셨으니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하였다.
정조는 내심으로 크게 기뻐하였다. 대신들의 반대로 사도세자를 추존하지 못하고 있던 차, 한 농부의 입에서 뒤주대왕 애기능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그 농부에 대하여 너무나 고마웠다. 그래서 농부에게 글을 얼마나 읽었는지 물어보았다. 그 농부는 책도 많이 읽고 과거도 여러 번 본 실력 있는 선비였으나, 번번이 낙방한 불운한 선비였다. 다시 한 번 과거를 봐 보라는 정조의 말에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또 떨어질 것이 뻔하다 하면서 관심이 없었다.
정조는 그 농부의 마음을 겨우 돌려 다시 한 번 과거를 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정조는 급히 환궁하여 과거시험을 보게 하는 영을 내렸다.
과거시험을 보러간 선비가 과거시제를 받아보니 융능 근처에서 있었던 자신과 어느 선비의 대화를 적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신만 붙게 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급제하고 왕을 배알하던 중 알고 보니 그 어느 선비가 바로 임금님이었던 것이다.
▼ 10시26분 서장대에서 바라보는 수원시내
※ 수원(水原)의 지명유래
아득한 옛날 부족 국가 시절, 마한(馬韓)에 ‘모수국(牟水國)’이란 마을이 있었다고 중국 측 사서는 적고 있다. 이 모수국(牟水國)이 지금의 어디인지는 정확히 비정할 수 없으나, 삼국 시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있던 5세기 말엽에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때까지 불렸다는 ‘매홀(買忽)’과 대체로 같은 지명일 거로 추정한다.
중국 측 기록인 모수(牟水)와 우리 측 기록인 매홀(買忽)이 당시 어떻게 불렸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다만, 이 땅이름은 비록 한자로 적었으나 우리 고유어임이 분명하고, 또 ‘모(牟)’나 ‘매(買)’는 발음상 물[水]과 관련된 어사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고유 문자가 없던 시절, 한자의 음과 뜻[訓]을 빌어 고유 명사를 표기한, 소위 말하는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의 난해성이 고유어로의 접근을 가로막는 것이다.
모수(牟水) 혹은 매홀(買忽)로 기록된 고유 지명은 신라의 삼국 통일과 함께 큰 변화를 겪는다. 순수 고유어로 불리던 삼국의 땅이름이 2자(字)로 된 한자어 지명으로 바뀌는 지명개혁을 맞이한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757년(경덕왕 16)에 이르러 매홀(買忽)은 지명의 본뜻을 살린 한자어 ‘수성(水城)’으로 개칭된 것이다. 물론 지명의 보수성으로 말미암아 원주민 사이에는 이후 오랫동안 매홀(買忽)이란 고유명이 쓰였겠지만 수성(水城)에서 비롯된 ‘수주(水州)’, ‘수원(水原)’ 등의 ‘수(水)’자 계 행정지명이 점차 이 지역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 잡게 되었다.
한자어 지명 수성(水城)은 고려 건국 초(940년 : 태조 23) 중국식을 모방하여 수주(水州)로 개칭한 것을 필두로 ‘수주목(水州牧)’을 거쳐 지금처럼 수원(水原)이란 이름이 등장한 시기는 1310년(충선왕 2)에 이르러 ‘수원부(水原府)’가 설치되면서부터이다. 이 이후의 변천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열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군(郡)·성(城)·주(州)·부(府)·도호부(都護府)·목(牧)·읍(邑)·시(市) 등은 행정 개편이 있을 때마다 승격과 강등을 반복한 행정 명의 변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후 수(水) 또는 수원(水原)과는 별도로 또 하나의 이름인 ‘화성(華城)’이 탄생한다. 주지하는 대로 이 한자 지명은 1783년 정조 대왕이 아버지 사도 세자의 능침(陵寢)을 이곳으로 옮기고 새로운 도시 건설을 위해 화성을 쌓음으로써 비롯된 이름이다.
▼ 10시31분 성곽을 따라 서북각루로 이어간다.
▼ 10시34분 서북각루을 거쳐 화서문으로 이어간다.
※ 각루(角樓)는 성곽 부분 가운데 높은 구릉을 택하여 누각 모양의 건물을 세워, 주위를 감시하고, 가끔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정자처럼 다기능성이 있는 건축물이다. 화성에는 동북각루, 서북각루, 동남각루와 서남각루 등 4개의 각루가 설치되어 있다.
▼ 10시37분 화성 성곽 출발지 화서문으로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아왔다. 이제 화성행궁을 답사하면 오늘의 수원 화성 탐방은 약 2시간 정도 마무리 된다.
※ 화서문(華西門)은 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꺾이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홍예문 사이 좌우의 무사는 높이가 각각 18척이고 수문청은 문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1964년 9월 3일 보물 제 403호로 지정되었다.
▼ 10시37분 화서문에서 이정표 화성행궁까지 800m 거리다. 화성행궁으로 이어간다.
화성행궁(華城行宮)은 정조가 능원에 참배할 때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소에는 부사(府使) 또는 유수(留守)가 집무하던 곳으로 활용되던 행궁이다.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되었다. 567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모든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파괴되었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었고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되었다.[1] 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옮긴 이후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2년 간 13차례에 걸쳐 화성에 행차했고, 이때마다 행궁에 머물렀다
조선후기 마지막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개혁을 시도했던 개혁군주 정조가 신도시 화성과 행궁과 관아와 백성들이 살아갈 민가를 짓고, 화성의 주변에는 당시우리의 전통축성기법에 세계적인 축성법을 두루 모아서 지은 네모난돌과 흙을 구워만든 벽돌로 지은 5.3km의 성곽과 문루를 지었던 정조.!!
그러나 정조는 49살의 나이로 개혁을 한참 진행하던 중 갑자기 승하하고 말았다. 그가 그리도 허무하게 간 뒤 그의 아들 순조는 화성행궁의 가장 안쪽에 아버지 정조의 어진을 그려서 모실 별도의 사당을 짓고 그 옆에는 혹시라도 발생할 화재시에 어진이 대피할 작은 익사건물도 지었다. 그리고 그 운한각과 익사 사이에는 회랑을 지어 왕의 어진이 행차하는데 눈비를 맞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정조 당시에는 조선조 당쟁의 회오리가 극성을 이루던 시기였고, 영조는 자신의 아버지인 장조(사도세자)가 그 당쟁의 회오리를 넘지 못하고 한많은 세상을 떠난 뒤 그런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왕다운 왕이 되고자 애썼지만, 하늘이 허락하지 않은 왕조의 정치개혁은 한낮 꿈으로 그치고 말았다.
▼ 10시55분 화성행궁 정문이다. 즉 신풍루 가운데 문은 어도. 임금이 다니는 문이라고 한다. 오늘 답사온 학생이들이 화성행궁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 신풍루(新豊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으로, 1790년(정조 14년)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다른 고향'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때 신풍루 앞에서 정조가 친히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끓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가운데 문은 어도(御道)로, 임금만 지나갈 수 있다.
▼ 화성행궁 지도 - 우측으로 운한각 부터 돌아보는데 약 35분 정도 소요되었다.
▼ 11시05분 화성행궁 신풍루로 들어가서 우측으로 진행하면 만나는 운한각이다. 설명은 아래 ↓
※ 운한각(雲漢閣)은 화령전의 정전(正殿)으로 정조의 초상화을 봉안한 건물이다. 운한은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여 하늘에 기우제을 올릴 때 불려졌다는 『시경』 의 시(詩구)에서 따왔다. 앞에는 제사 때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할 수 있은 월대가 있고 세 개의 계단이 놓여있은데 가운데 계단은 혼백만 사용 계단이다. 1801년 만들어진 조선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다.
▼ 11시09분 화성행궁 우물
▼ 11시11분 화성행궁
▼ 11시12분 화성행궁에는 봉수당 장락당 복내당 노래당 경룡관 집사청 북군영 남군영 서리청 등등 많은 건물들이 있다.
※ 봉수당(奉壽堂)은 화성행궁의 정전이자 화성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정조는 17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하였다. 이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인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또 혜경궁 회갑연을 마치고 9년 뒤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진찬례는 조선 최대의 궁중 행상로 당시 커다란 화제거리였으며,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이 건물은 1789년(정조 13) 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에 복원되었다.
▼ 11시13부 화성행궁
▼ 11시24분 화성행궁 유여택 뒤로 팔달산의 서장대가 조망된다.
※ 유여택(維與宅)은 평소에 화성유수가 기거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건물이다.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원래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년)에 건립되어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건물은 동향으로 왼쪽에 공신루(供宸樓)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하였다.
1795년 행차 시에 정조는 유여택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 11시27분 화성행궁에는 좌익문 중앙문 등등이있다.
▼ 11시31분 화성행궁 답사를 마치고 신풍루 앞에서 하마비를 만난다. 즉 말(馬) 주차장이라 할까. 말을 타고 온 사람은 ..
▼ 11시30분 화성행궁 홍살문 앞에서 산행거리 11.4km 3시간15분 산행을 종료하고 숙박지 로즈모텔로 도보이동하여 내일 안양 수리산 산행지 안양9동 병목안시민공원 도착, 산행기점 위치 확인후 안양6동 쉘모텔에서 숙박한다.
※ 화성행궁 앞에 있는 홍살문
홍살문의 사전적인 의미는 능(陵), 원(園), 묘(廟), 궁전(宮殿) 또는 관아(官衙) 등의 정면 앞에 세우던 붉은 물감을 칠한 나무문이라고 되어있다. 홍살문은 서원, 향교에도 설치했고 충신, 열녀, 효자 등을 배출한 집안이나 마을 등에도 세웠다. 신성시 되는 장소를 보호, 공경하고 벽사의 의미도 들어있다.
홍살문은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형태는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태극 문양은 2태극, 3태극, 빛을 넣은 3태극 등으로 표현했고 태극 문양 위는 2지창, 3지창이 있다.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앞에는 팔달산에서 발원해 화성행궁 정문 앞을 흐르는 명당수가 있다. 명당수에는 악귀를 막기 위해 금천교라는 다리를 만드는데 바로 신풍교이다. 신풍교를 지나면 홍살문이 있는데 이 홍살문은 화성행궁을 보호하고 신성시하는 역할을하고 있다.
▼ 수원 화성 안내도 -------------------
▼ 수원 화성 안내도 -------------
▼ 수원 화성 5만 지도
7. 차량이동(올 때);
♤12:45 수원 로즈모텔→시흥시→13:30 안양시 안양9동 병목안시민공원 도착(15분 숙박업소 없음)→차량이동→14:00 안양시 안양6동 쉴모텔 도착
♤차량이동시간; 1시간15분
♤차량왕복이동거리; 25km<25,060km→25,085km>
8. 경비;
♧화성성곽입장료 1,000원 화성행궁관람료 1,500원 점심식사 5,000원 쉴모텔 40,000원 저녁식대 6,000원 슈퍼 11,200원 휘발유소모25km 5,000원
♧합계; 79,700원
9. 특기사항
10. 작성일자; 2013년5월23일(목) 15시40분 안양6동 쉴모텔에서.........
11. 작성자; *******************963-13-45********************* 도시속의 野人 海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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