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록1 (2010년~2019년)/전라남도 광주

해남 병풍산 태양산 고산윤선도 묘

靑谷 2011. 4. 27. 16:00

해남 병풍산(屛風山) 태양산 고산윤선도 묘

일자; 2011424() 날씨; 구름조금

 

1. 산명; 병풍산(屛風山)315.7m~태양산308m~고산 윤선도묘

2. 위치;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백도치

3. 인원; 청노루 영암 해남 강진지역 6일째(6박7)

 

4. 차량이동(갈 때);

06:07 황토그린민박<조철환승용차>06:17 백도치 도착

차량이동시간; 00시간10


   이른아침 황토그린민박에서 동기생친구의 차에 타고 오늘의 병풍산 산행기점 백토치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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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 병풍산 태양산 고산윤선도 묘 트랙지도



5. 산행코스;

06:20 백도치태양분맥 능선06:34 (남향아스콘 석산)06:50 산길불투명 사면길07:01 능선(태양분맥)07:16 능선에서 하산07:36 계곡길(알바)07:50 남향아스콘 공사장(10)08:00 남향아스콘 입구08:15 다시 계곡길08:35 사면길합류08:41 능선(태양분맥)09:07 능선안부(15)09:32 ×305(병풍산 왕복)09:35 병풍산315.7m 태양분맥 능선/길없음09:59 갓바위(전망대)10:33 태양산308m10:42 길메재10:58 오시미재11:04 송전탑11:22 삼각점×245태양분맥 능선 잡목 길없음11:50 ×275.6(태양분맥 이탈)12:11 능선탈출12:14 임도12:26 금쇄동삼거리12:30 고산윤선도 묘(점심35)13:18 고산윤선도 신도비13:21 임도(문소천)13:55 해남윤선도유적14:10 구터마을(해남 현산면 구시리) 도착

산행시간; 7시간50<알바3.6km 1시간34분 포함>

산행거리; 14.8km(도상거리)

 

6. 트랙 2011-04-24 해남 병풍산 태양산 고산윤선도 묘(11.2km).gpx

          2011-04-24 해남 병풍산 태양산 고산윤선도 묘(원본).gpx



▼ 해남 병풍산 태양산 고산윤선도 묘 산행지도


▼ 해남 병풍산 태양산 10만 지도




 

[우리문화 우리풍수 | 해남 금쇄동]


풍수지리 학문에 관해 본래 신안(神眼)의 실력을 갖추었다.”

 

고산 윤선도에 대해 풍수의 최고 단계인 신안이라고 극찬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 풍수학자이기도 한 정조 임금(주간동아 353호와 448호에 소개됨)이었다. 문학가로 더 잘 알려진 고산 윤선도(1587~1671)는 풍수학사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명당으로 알려진 그의 고가(전남 해남 녹우당)와 무덤엔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풍수지리에 정통한 고산은 효종이 승하하자 좌의정 심지원의 추천으로 왕릉 선정에 참여한다. 그는 여러 곳을 답사하고 난 뒤 수원 땅을 최고의 길지로 추천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송시열, 송준길 등이 반대했기 때문. 훗날 정조는 고산이 추천한 곳의 진가를 알아보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는데 그곳이 바로 수원 옆 화성의 융릉(隆陵)이다. 정조가 신안으로 인정한 고산의 풍수학맥은 이의신(李懿信, 윤선도와 인척관계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과의 만남을 통해서 형성됐다.

 

이의신은 해남 맹진 출신으로 1600년 선조 임금 어 부인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떴을 때 왕릉 선정에 참여하면서 선조에게서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광해군 때는 경기도 파주 교하로 도읍지를 옮기자는 교하 천도론을 주장해 몇 년 동안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은 장본인이다. 이러한 이의신와 고산 사이의 명당 빼앗기전설은 이 고장뿐만 아니라 풍수가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의신이 고산의 집에서 기거하고 있을 때, 밤중이면 몰래 말을 타고 집을 빠져나가 새벽녘이면 슬그머니 돌아오곤 했다. 고산은 이의신이 명당을 찾았음을 짐작하고 어느 날 그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해 일찍 잠에 빠지게 했다. 잠이 든 것을 확인한 고산은 평소 이의신이 타던 말을 앞세우고 집을 나섰다. 말은 밤중이면 언제나 가곤 하던 그 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 어느 지점에 멈추었다. 자리를 살펴보니 과연 천하의 명당이었다.

 

고산은 주변에서 썩은 나무막대 하나를 찾아 그 자리에 묻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고산은 이의신에게 자신이 잡아놓은 자리가 하나 있으니 한번 봐달라고 했다. 이의신이 따라 가 본 곳은 다름 아닌 자신이 잡아놓은 자리였다. 이의신이 명당에는 임자가 따로 있다면서 고산에게 양보하였다.”

 

전설은 상당 부분 사실인 듯하다. 우선 녹우당에서 고산 무덤이 있는 금쇄동까지 걸어서 1시간 반 거리도 되지 않기 때문에 어린 시절 걸어서 많이 참배를 하였다는 고산의 종손 윤형식(녹우당 거주) 선생의 말씀과 전해지는 이야기에 나오는 거리가 비슷하다. 그러나 전설처럼 고산이 이의신의 자리를 빼앗았다기보다는 나이가 훨씬 많은 이의신에게 풍수를 배우는 과정에서 좋은 자리를 추천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로 서얼 출신인 이의신이 금쇄동(고산 묘역 일대)을 사들일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금쇄동의 면적은 120여만평으로서 지금까지 종가 소유로 전해온다.



▼ 06시20분 구림리 백토치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백토치 좌측은두륜산 향로봉에서 흘러온 산줄기가 백토지에서 병풍산으로 이어가는데 2시간 정도 소요된다.


※ 해남 병풍산(屛風山)고산문학 산중신곡의 산실 수정동 , 금쇄동 , 문소동 을 머금고 있다.

 

한국시조문학의 대가 고산 운선도의 은거지였던 금쇄동과 문소동, 수정동을 품은 병풍산은 옥녀탄금형이라는 해남읍의 형세 중 병풍에 해당하는 산이다. 그 산이 비록 크고 높지는 않으나 곳곳마다 고산의 발자취가 서려 있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 준다.
  
산행은 보통 현산면 만안리 백도재로부터 시작한다. 남양아스콘 석산 옆으로 등산로가 이어지고 약 30분 가량 오르다 보면 이내 수정동터에 닿는다. 이곳에서 병풍바위와 호랑이굴을 지나면 병풍산(313.1m) 정상에 이르게 된다. 병풍산 정상에서는 두륜산의 힘찬 줄기가 조망되고, 남으로 구시저수지의 맑은 물이 굽어보인다.


정상에서 게속 능선을 따르다 보면 몇 개의 바위절벽을 지나게 되고 이어 갓바위에 이르게 된다. 바위에는 사람 손이 닿지 않은 부처손이 그득하다.



▼ 06시21분 백토치를 뒤로하고 능선으로 올라붙었은데.. 인적의 발길이 끊어진지 수십년 된것같다.


▼ 06시34분 능선 좌측으로 남양아스콘 석산이다.


▼ 06시42분 능선 흐미한 길의 흔적을 더덤어간다.


▼ 06시52분 길의 흔적따라 계곡사면길로 가다, 우카. 엉망이다. 가시나무와 잡목이 엉퀴고 설켜서 헤쳐나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 07시04분 마루금 능선에 올랐으나 여기도 다를바 없다. 아니 이지역 전체가 다 이모양인것 같다. ㅋ 난감하네.


▼ 07시14분 능선길 진행이 어려워 길의 흔적 따라가니 남양아스콘 석산으로 이어진다.


▼ 07시36분 능선에서 좌측으로 벗어나 계곡으로 이어져 ..


▼ 07시38분 남양아스콘 석산 공사장에서 입구쪽으로 후퇴하여 좀더 연구할 생각이다. 산행을 포기해야할지 기점을 다른곳으로 잡아야 할지.


▼ 08시01분 남양아스콘 석산에서 계곡으로 들어가 35분후 처음 능선사면길에서 합류되어 잡목과 덩굴을 뚫고 능선으로 치고올라 08시41분 능선 위(태양분맥)에 선다.


▼ 09시07분 보시다시피 아시다시피 질레가시나무와 .. 병풍산으로 능선이어가는데 어려움이 말로 표현이 안되네. 40여분 병풍산에 이른다.


▼ 09시35분 병풍산분기점에서 병풍산 정상 300여미터 다녀와야 하는데 실력부족으로 여기가 병풍산으로 알고 그냥 넘어간다.


▼ 09시35분 병풍산에서 가야할 방향


▼  병풍산 정상  차후에 모셔온사진


▼ 09시36분 병풍산을 벗어나면서 가야할 능선


▼ 09시37분 능선길 바위에서 지나온 병풍산. 20여분후 갓바위에서 올라선다.  


▼ 09시59분 갓바위에서 조망이 좋아 이리저리 살펴본다. 문소천계곡 산판길이 나중에 윤선도 묘에서 하산할 길이다.


▼ 09시59분 갓바위에서 가야할 태양산


▼ 09시59분 갓바위에서 동남 방향은 두륜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능선 우측은 금쇄동(구.해남산성)에서 흘러내린 능선.


▼ 10시09분 능선길 태양산이 크게 닥아오고있다.


▼ 10시09분 햐! 이거. 어제 산행한 곳이 한눈에 쏙 들어오네. 해남읍 금강산에서 호산까지. ㅋ 어제 서당산에서 칡넝쿨에 뿔이 걸려 오도가도 못하던 노루 구해주었은데 오늘 어디서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 10시33분 태양산 정상에서 가야할 능선 문소천 산판길이 한눈에 싸악 들어오신다.


▼ 10시34분 병풍산 정상이다. 후자사진은 실체감을 느낄수있게, 최근에 정상표시판이 부착사진을 모셔온것이고 10여분후 길메재에 이른다.


▼ 10시42분 길메재에 도착한다. 우측으로 희미하게 길의 흔적은 남아있고 또 식당? 현수막이 손님을 유혹하고있다.


▼ 10시44분 능선길 내친구 동기생 고향 삼산면지역에서 멀리 금강산 해남읍이 낮은자세를 취하고 있다.


▼ 10시58분 오시마재 도착한다. 산중에 가옥이있었던 흔적이 남아있고 능선오르면 송전탑을 만나고 또 잡목과 덩굴 등등이 능선을 집어삼켜 진행이 어럽다.


▼ 11시04분 송전탑에서 20여분 능선이어가면 삼감점이있은 245봉에 올라선다.


▼ 11시07분 작은산에 제법 등치가 큰 바위가 산객을 반겨준다.


▼ 11시09분 바위에 올라서 조망이 좋다. 지나온 능선 함 훌어보면 멀리 두륜산 라인이 구름속에서 오락가락한다.


▼ 11시22분 삼각점이있은 245봉에 당도한다. 이후 능선은 잡목과 덩굴 가시나무에 엉켜 꼼짝 못하는데 겨우겨우 25분후 275.6봉에 이르러 태양분맥과 이탈되어 좌측으로 능선을 바꾸어 12시11분 능선에서 좌측으로 탈출하여 산판길(임도)에 닿은다.


▼ 12시14분 임도길에서 20여분 오르면 고산 윤선도 묘에 당도한다.


▼ 12시26분 금쇄동갈림길. 이정표가 말을 해준다. 여기서 아뿔사! 금새동 다녀와서 고산 윤선도 묘로 이어가야한는데 바쁜마음에 윤선도 묘로 이어가 금쇄동을 답사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 12시31분 천하의 명당터 고산 윤선도 묘라 카는데. 점심과 휴식으로 35분 정도 즐겨운 시간 보낸후 명당 자리를 떠난다.


※ 형세론 대표 명당 고산 윤선도 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임진왜란 직후 조선 풍수의 주류는 이의신윤선도정조로 이어짐이 확실하다. 또 이들 풍수의 특징이 모두 한 가지라는 점이다. 풍수지리의 유파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땅의 형세를 육안으로 살펴서 길흉화복을 말하는 형세론(形勢論)’이고, 다른 하나는 나침반(패철)으로 길흉화복을 보는 이기론이다. 바로 이의신이 형세론을 견지했음을 조선왕조실록에서 밝히고 있다. 고산도 철저하게 형세론자였음을 자신이 쓴 산릉의’(1659)에서 보여준다. 정조 역시 형세론이 중심이 되어야 함을 홍재전서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조선 후기는 형세론이 주류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고, 현재 해남 금쇄동에 있는 고산의 무덤은 조선 후기 풍수의 특징을 보여주는 곳이라 할 수 있다.



▼ 12시35분 고산 윤선도 묘 앞에서 ..


▼ 12시36분 고산 윤선도 묘 문인석


▼ 12시37분 고산 윤선도 묘 옆에서 ..


▼ 13시19분 윤선도 묘와 가까운거리에있은 고산 윤선도 신도비 누군가가 비각 양쪽에 흠집을 내었은데 무슨 사연일까?


※ 증이조판서시충헌윤공신도비명(贈吏曹判書諡忠憲尹公神道碑銘)

유명조선증자헌대부이조판서 ~마멸~조 국 숭록대부 ~마멸~ 의정겸 ~마멸~추관사(有明朝鮮贈資憲大夫吏曹判書 ~마멸~ 朝 國 崇 祿大夫 ~마멸~ 議政兼 ~마멸~ 秋館事) 허목(許穆)이 찬술하였고,

외손(外孫) 숭록대부행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사 세자우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崇祿大夫行吏曹判書 兼 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 世子右賓客 五衛都摠府都摠管) 심단(沈檀)이 삼가 글씨를 썼으며,

4세 종손(宗孫) 유학(幼學) 덕희(德熙)가 삼가 전액을 썼다.

 

윤선도(尹善道)의 자는 약이(約而)로 본관은 해남(海南)이다. 4세조(世祖)는 국자감 상사(上舍) 윤효정(尹孝貞)으로,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 이후로 숨어 살며 세상에 나오지 않고 스스로 호를 어초은자(漁樵隱者)라 하였다. 홍문관 부교리 윤구(尹衢)를 낳았는데, 또한 기묘 명신(己卯名臣 기묘사화 때에 화를 입은 사림(士林))으로 이 사실이 기묘당적(己卯黨籍 기묘년에 화를 입은 제유(諸儒)의 약전(略傳))에 실려 있다. 교리는 우참찬 윤의중(尹毅中)을 낳았으며, 우참찬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윤유심(尹惟深)이고, 작은아들은 윤유기(尹惟幾)이다. 윤유심은 부정(副正)까지 하였고 윤유기는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는데, ()은 부정의 아들로 관찰사의 양자가 되었다. 본래의 생모(生母)는 안씨(安氏), 좌의정 안현(安玹)의 손녀이다.

 

만력(萬曆) 15(1587, 선조20)에 공이 출생하였는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널리 경사(經史), 백가(百家)를 읽었으며, 의약(醫藥), 복서(卜筮), 음양(陰陽), 지리(地理)까지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13시20분 고산 윤선도 신도비를 뒤로하면 문소천 산판길이다. 우측 구터마을 방향으로 내려가면 산행이 마무리 된다.


▼ 13시22분 해남 윤선도 유적 안내판이있은곳으로 이어가면서 좌측에는 지나온 능선이 쳐다보고 임도에는 아름다운 민들레 곳곳에 피어있다.


▼ 13시44분 문소천 산판길. 좌측 지나온 능선에서 갓바위가 쳐다보고 그뒤에 병풍산이 숨어있다.


▼ 13시52분 해남 윤선도 유적 안내도가 있은곳에 이른다.


▼ 13시55분 조선중기 이상형 세계을 꿈꾸었던 윤선도 유적이다.


※ 금쇄동 유적

금쇄동은 고산 윤선도가 64세인 1,640년 꿈속에 그리던 이상향의 마을입니다. 윤선도가 강화도에 피난중인 원손대궁을 구출하고자 사람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출발하였으나, 이미 잡혀가 낙심하고 제주도로 향하던중 산수가 화려한 보길도를 방문하였던바, 현재의 마을에 터를 잡아 부용동(연꽃 피는 동네)라 칭하고 낙서재를 만들어 그곳에 기거하고 세연정을 만들어 양반놀이의 진주를 보여주는 조선 3대 정원 중의 하나인 을 만들게 된다.

 

보길도 주거지인 부용동을 떠나 이곳에 묘택을 마련하고 85세에 명을 다하고 500년 해남윤씨의 부귀 영화를 지켜보고 있는 곳이다. 선생은 이곳 금쇄동에서  길히 남을 산중별곡등 의 문집을 남기게 됩니다. 오우가 또한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오우가는 윤선도의 평상시 생활처럼 자연을 주재로 하는 水石松竹月을 이야기 하는 시이다.



▼ 13시57분 금쇄동 안내도와 이정표. 여기서 동기생 친구 조철환에게 전화한다. 10여분 지난후 구터마을 부근에서 친구 조철환과 합류되어 산행이 종료된다.


▼ 14시10분 구터마을에서 산행거리 14.8km 7시간50분 산행을 종료하고 친구동기생 조철환의 차에 타고 황토그린민박으로 이동한다.




▼ 해남 병풍산 태양산 개념도


▼ 해남 병풍산 태양산 금쇄동 개념도


▼ 해남 병풍산 갓바위 태양산 안내도


▼ 해남 병풍산 태양산 금쇄동 지도 / 5만


▼ 해남 병풍산 태양산 금쇄동 5만 지도


▼ 해남 병풍산 태양산 지도


▼ 해남 병풍산 5만 지도

 

 

7. 차량이동(올 때);

14:10 구터마을<조철환승용차>14:20 황토그린민박(해남 삼산면 평활리) 도착

차량이동시간; 00시간10

 

8. 경비;

1)저녁식사 초원갈비 뼈따귀탕(3) 28,0002)황토그린민박(4일간) 100,000

합계; 128,000

 

9. 특기사항

1)해남의 옥녀탄금형 산줄기 답사하고 고산 윤선도선생의 금쇄동(고 해남산성)을 답사하지 못한 아쉬움을 두고 마무리한다

2)오늘 저녁 조철환 부부와 삼산면소재지 초원갈비식당에서 감사의 뜻을 전한다

 

10. 작성일자; 2011427() 1500분 자택에서.................

11. 작성자; **********************742-11-28****************** 도시속의 野人 海廣


2011-04-24 해남 병풍산 태양산 고산윤선도 묘(원본).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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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4 해남 병풍산 태양산 고산윤선도 묘(11.2km).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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