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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희 선생의 <혼불>과 풍수지리

靑谷 2012. 12. 5. 13:19

♧최명희 선생의 <혼불>과 풍수지리

 

▲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 마을의 진산인 노적봉(露積峰, 567.7미터)이 보인다.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은 최명희(1947~1998) 선생의 소설《혼불》의 배경지이다. 또한 작가 최명희 선생의 부모님의 고향이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청암 부인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혼불마을>로도 지정돼 있다. 마을 입구에는 소설 《혼불》'의 냄새가 나는 '꽃심을 지닌 땅', '아소님하'를 새긴 한 쌍의 장승이 나란히 서 있고, 마을 안에는 양반집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종가집이 있다. 이 집은 종부(청암부인)의 집을 옛 양반가의 종가집으로 복원한 것인데, <혼불문학의 집>으로 불리고 있다. 근처에는 최명희 선생의 혼불문학비도 서있다.

 

소설《혼불》속에는 풍수지리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우석대 김두규 교수는 “개안(開眼)한 풍수사들조차 감히 따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르고 있다”며 “대개 풍수지리는 나이든 남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인데, 어떻게 신세대에 속한다 할 수 있는 여류 작가가 풍수지리의 본질에 대해 그렇게 완벽한 이해를 할 수 있을까 궁금할 정도입니다”라고 말했다. 최명희 선생의《혼불》의 배경지가 된 노봉마을 풍수와 소설 속의 풍수내용이《전라문화바로보기》<풍수지리로 본 ‘혼불’속의 노봉마을>(송화섭)과 《풍수강의》<문학속의 풍수지리>(김두규)에도 등장한다. 다음 글들은 《혼불》(최명희)과 함께 모두 세 권의 자료(책)를 통해 정리를 해본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매안마을은 현재의 노봉마을을 가리킨다.

 

▲종가댁 전경(上). 종가댁 뒤란의 지기 창고인 공지(下)

 

소설의 무대가 됐던 노봉마을은 《사매면주민썬터 누리집》에 따르면, 본래 남원군(南原郡) 사동면(巳洞面) 서원리(書院里)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때 서원리(書院里)와 도촌리(道村里)를 병합하여 서도리(書道里)라 하고 서도리에 편입되었다. 노봉(露峯)마을이 생성된 내력은 분명히 알 수 없으나 호성암(虎成庵)과 노유재(露濡齋) 등의 유래를 참고해보면 신라 말이나 고려 초쯤으로 추정된다. 본래는 마을 앞거리에 사람이 살다가 계곡 쪽으로 옮겼다고 전해온다. 그 1400년 후반에 삭녕최씨(朔寧崔氏)가 정착하여 최씨의 집성촌으로 형성되었다가 오씨, 김씨, 차씨 등이 들어와 오늘에 이른다. 처음 이 마을의 이름은 서원리(書院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7년 발행된 지명 자료에 따르면 현재의 지명인 노봉(露峯) 마을이 없을 뿐 아니라 이곳에 노봉서원(露峯書院)이 있었기 때문에 서원리(書院里)로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노봉(露峯)으로 부르고 있다.

 

▲종가댁으로 흘러 오는 지기(바위맥)

 

마을 뒤에 있는 노적봉은 풍악산의 줄기에 노적을 쌓은 듯이 우뚝하게 들어나 있어 여러 선인들로부터 애칭을 받아 왔고, 전라감사였던 이서구(李書九)가 남원부에 행차도중 율치(栗峙)를 지나다가 노적봉을 바라보고 ‘군자의 가거지(可居地)’라고 칭찬했다는 설이 있는데, 노적봉의 우람하고 군자다움과 계관봉(鷄冠峯)이 병풍을 두른 듯하여 드높은 기상이 쌍벽을 이루면서 생겨난 정기 아래 생성된 마을이 노봉마을이라고 한다. 지역 내에는 고려 초에 도선국사(道先國師)가 이곳을 지나다가 터를 잡아 주었다는 호성암(虎成菴)이 있는데 남북의 분단 상황 속에 무장공비의 은신처가 된다하여 철거되어, 지금은 석벽에 조각된 마애불상만이 외롭게 남아 있으며 그곳 능선 넘어 둔터암이라는 암자 터만이 남아 있다. 또한 사액서원인 노봉서원이 있는데 불행하게도 대원군의 서원 철거령에 의하여 훼철되고 지금은 옛터에 주춧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신라 때 최치원 선생께서 썼다는 삼계석문(三溪石門)이란 석각으로 미루어 볼 때 이곳 인근 마을의 형성도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볼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의 윗쪽에 위치한 전방(全芳)이에 맨 처음 전씨(全氏)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고 전하고 있으며 그 후 이합집산으로 차차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 혼성 촌을 이루어 오다가 조선조 중엽부터 최씨들이 대거 이주하여 와서 서원과 더불어 살다가 근세에 이르러 또다시 최씨, 차씨, 오씨, 허씨 등 각 성씨들이 거주하고 있는 충·효의 얼이 높은 마을이라고 한다.

 

▲종가댁으로 흘러드는 지기 담장 앞 바위

 

먼저 노봉마을에 깃든 풍수지리에 대해 살펴보자. 노봉마을의 주산은 노적봉(露積峰)이다. 노적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에 대해, 소설 속에는 “서산 노적봉은 등 뒤에 병풍같이 둘러 세우고 멀리 아득한 능선으로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는 마을 매안의 지형은, 검푸르게 우거진 소나무 산 노적봉의 기맥이 아래로 내리다가 기슭에 이르면서 평평한 둔덕을 짓고 고이는데, 그 자락 끝에 나붓이 드러난 발등과 같이 도도록하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송화섭 선생은, 이 줄기는 좌청룡에 해당한다며, 산줄기가 평평한 둔덕처럼 보인 것은 기맥이 약하게 내려 왔음을 의미한다고 말하면서, 실제 노봉마을은 좌청룡이 약하다. 그 약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둔덕에 소나무을 심어 비보를 하였으며 발등에 정자를 세우고 도도록한 청룡날 끄트머리에는 선돌을 세워 강한 힘을 불어넣었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주맥혈에 대해서는 “최명희 씨의 종가 뒤에는 검푸른 소나무 숲의 노적봉에서 내려온 주맥이 혈을 이루고 있으며 혈처(穴處)에서 크고 작은 바위덩이가 밤나무 사이사이에 어우러져 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종가를 혈처로 봤을 때 우백호는 어디인가. 좌청룡 끝자락에 세워진 선돌 건너편에 “내백호의 기맥은 노적봉에서 내리 뻗은 힘이 웅혼하고 당차다. 내청룡에 비하여 내백호는 강직해 보인다. 아낙네들이 강하게 힘을 받을 형국이다.”라고 하면서, 흔히 풍수에서 이상적인 좌청룡 우백호에 대한 청룡완연(靑龍宛然)과 백호준거(白虎蹲踞)를 거론한다. 즉 청룡은 꿈틀거려야 하고 백호는 온순해야 좋다고 하는데 노봉마을 풍수는 그와 반대라며 그런 만큼 남자를 상징하는 청룡대신 여자를 상징하는 백호가 건실해서 아낙네들이 강하게 힘을 받을 형국이라고 말한다.

 

노적봉 줄기의 지기가 흘러와 맺은 혈처에 자리 잡은 종가댁 풍수에 대해 송화섭 선생은 “노적봉 기백이 유연하게 내려와 멈춘 커다란 바위아래에 종가가 들어서고 유정하게도 그 힘을 살짝 흘려 집 뒷담 앞에서 멈추었다.(지금 그곳은 상수도 탱크가 들어섰다) 그 바위의 힘이 센 듯하여 바위와 종가 사이의 공지(空地)를 두어 이중으로 담을 둘렀다. 한마디로 그 공지는 지기뱅크이다. 참으로 지혜로운 생활철학이다. 은행이 통화량을 조절하듯 원뜸의 지기를 조절할 수 있는 완충지대로서 공지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맥을 뒤로하고 종가집은 안산의 방향에서 조금 비껴 자리를 잡고 있다”라고 말했다. 안산(案山)은 집 앞(종가댁)에 바로 바라다 보이는 가까운 산을 말하는데 눈높이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한다. 노봉마을 안산은 마치 여자의 유두(乳頭)같이 봉긋하게 부풀어 오른 단아한 모습이다. 종가를 중심(정점)으로 원뜸(동네 안에 따로 몇 집씩 모여 있는 곳 중 한 마을로 종가 댁은 원뜸에 있다)은 청룡자락에 자리 잡았다. 이 때문에 원뜸 사람들은 날마다 (보절면)천왕봉(909.6미터)으로 솟는 아침 태양의 강렬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유두혈 안산의 편안함을 바라다보면서 강직하면서도 유연한 인성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종가댁 좌청룡, 좌청룡 끄트머리에 기를 북돋기 위해 선돌을 세웠다(上). 종가댁 우백호(下)

 

노봉마을은 마을 혈자리가 있는 원뜸에 종가댁이 들어서 있고 이후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중뜸과 아랫몰이 형성되었다. 노봉마을 전반적인 풍수에 대해 “원뜸을 정점으로 내청룡과 내백호가 마을을 감싸 안고 마을 양옆으로 개여울이 흐르고 아랫몰 노인회관 앞에서 합수되고 있다. 이 개울도 구불구불 굽이지고 마을을 돌아 내려가며 청룡, 백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원뜸을 벗어나 아랫몰에 이르면 외백호와 외청룡이 내려와 감싸고 있다. 내백호와 내청룡보다 더욱 길게 뻗어내려 아랫몰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있으며 마을의 기운이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자 서로 조여 주고자 애쓰는 모습이다. 아랫몰에서 바라보아는 안산격의 낮은 동뫼가 안쪽으로 좀더 깊숙하게 들어와 외청룡과 외백호 사이를 좀더 조여 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뻑적지근하게 좋았을까. 서로 껴안고 조여줄수록 좋은 것인데 아쉽지만 그 모습도 좋다(송화섭)” 노봉마을은 수구가 약간 벌어진 듯하다.

 

그렇다면 소설 속에는 어떠한 풍수 얘기를 들어있는가. “한 사람의 인생에도 역시 혈이 있을 것인즉, 그 혈을 다루는 일이, 정신에 그리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제 인생의 맥 속에서 참다운 혈을 못 찾은 사람은 헛되이 한평생 해매일 것이요. 엉뚱한 곳에 집착한 사람은, 헛살았다 할 것이다.” 이 대목은 인생의 의미를 풍수혈처에 비유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흔히 몰래 묻는다는 밀장(密葬)에 대한 내용도 “나뭇가쟁이맹이로 차고 날려가 버릴 수 없는 거이 타고난 조상 뼈다구라면, 그거이 저 앉은 한펭상의 근본이라면, 내가 인자 저것의 조상이 되야서, 내 뼈다구를 양반으로 바꽈 줄 수는 도저히 없는 거잉게, 멩당이리도 써야제. 천하에 멩사(名師), 멩풍(名風)을 다 데리다가 묏자리 본 양반의 산소 옆구리를 몰래 따고 들어가서라도, 멩당을 써야제, 우리 재주로는 어디 그런 집안으로 신안(神眼) 뫼세다가 잡은 자리만헌 디를 다리 구할 수도 없을 팅게. 그 봉분 옆구리를 째고 들으가서도, 양바이 쓴 멩당인디 오죽헐 거이냐. 뼈다구 하나 잘 타고나 양반이 된 그 뼈다구 옆에 내 뼈다구 나란히 동좌석하고 있다가, 세월이 가고 나중에는 그것도 썩고 내것도 썩어 한자리에 한 몸뚱이로 얼크러지먼, 니 다리, 내 다리, 니 복, 내 복을 누가 앉어 따로 따로 개리것능가. 어찌 되얏든 그 자리다가 뫼 쓴 것이 되야 부렀는디. 그런 뒤에 멩당 기운이 발복(發福)을 허먼, 그 자손 내 자손이 똑같이 받겠지.”라고 묘사됐다.

 

최명희 선생의 풍수에 대한 얘기를 더 들어보면, “산세에 좌청룡이 승하면 친손이 공명을 떨친단 말이지. 친손이라면 남자를 이름이니, 남자의 기상이 늠름하여 남자가 그 집안에 대들보가 된다고 봐야지. 그러니 자연 우백호라 하면 오른쪽이요, 음이라, 음은 서쪽으로 해가 지는 방향을 가리키네. 빛깔은 흰색이란 말일세. 그런데 산세가 오른쪽이 승하면 백호가 포효를 하는 형상인지라, 외손이 승하게 된단 말이야. 외손이라면 여자 쪽을 말하는 셈이 돼서 자연 여자가 득세를 한다는 게야.”라는 것이다. 또한 “예로부터 사람이 모여 살아 마을을 이루는데 제일 좋은 명당은, 비산비야(非山非野), 산중도 아니고 들도 아닌 곳에 있다고 하였다.(…)그러고 보면 매안의 지형이 비산비야였다. 노적봉의 영기(靈氣)가 뻗어 내린 발들에 터를 잡아서 그 발 아래 논을 밟고 서 있는 형국이 매안의 지세였던 것이다.” 이렇듯 소설《혼불》속에는 풍수에 대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그래서 송화섭 선생은 “최명희는 노봉마을의 풍수를 잘 알소 있었음을 보여 준다”며 “풍수를 미신시하지 마라. 옛 사람들은 풍수를 기본적으로 볼 줄 알았다. 풍수는 생활철학이요 동양사상의 귀결점이다”라고 설파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1998년 작고한 풍수에 조예가 깊었던 최명희 선생의 안식처가 궁금해진다. 현재 모교인 전북대학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야산에 선생의 묘소가 있다. 이 곳은 전주시에서 제공한 장지인데 당시 최명희 선생의 동생인 최대범씨가 풍수학인들과 함께 마련한 자리라고 전해진다. 《복을 부르는 풍수기행》<‘혼불’작가 최명희 묘 불꽃같은 삶 ‘초롱불’안식처>(김두규)에 따르면, “최선생(최명희) 형제는 2남 4녀다. 여자 형제들은 문학에 재능을 보여 세 자매가 모두 국문과를 졸업했다. 막내 여동생도 국문과에 입학하려 했으나 세 언니들이 작가가 배고픈 직업이라며 극력 반대하여 전공하지 못했다. 최선생이 풍수에 조예가 깊어지게 된 것은 외조부 허완을 통해서였다. 선생의 외조부는 예학뿐만 아니라 주역과 풍수에도 능하여 작가가 ‘혼불’을 집필할 때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고 한다. 최선생 동생과의 대화를 통하여 최선생이 좋아할 만한 땅이라고 여겨지는 곳을 찾아 선생의 묘소를 정하게 되었다. 그가 다녔던 전북대가 내려다보이고 가까이에 그이 작품에 등장하는 덕진연못이 있는 곳. ‘혼불’의 풍수 관련 대목에서 묘사하는 것과 의미가 상통할 수 있는 곳을 찾은 것이다. 현재 최선생 묘소는 그렇게 해서 정해졌다. 작가가 결혼하지 않아 자녀가 없기 때문에 자손의 발복을 고려하지 않는 대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언제까지나 잊지 않고 찾아와 작가를 기릴 수 있는 자리다. 선문대 풍수학 강사인 최낙기씨는 ‘최선생의 무덤 터는 멀리서 보면 마치 초롱불 같다’고 했다. 무덤은 거기에 안장된 사람을 그대로 반영한다. ‘혼불’이 터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혼불》쓴 최명희 선생의 산소는 ‘마치 초롱불 같다’고 했는데, 문득 박남수 시인의 <초롱불>이란 시가 아래와 같이 떠오르는데, 최명희 선생의 초롱불은 시 구절의 “흔들리는 초롱불은 꺼진 듯 보이지 않는다”라가 아닌“흔들리는 우리들의 어둔 마음을 밝혀 잡아주는 늘 빛나는 초롱불”은 아닐까.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 밑에

행길도 집도 아주 감초였다.

 

풀 짚는 소리 따라 초롱불은 어디로 가는가.

 

산턱 원두막일 상한 곳을 지나

무너진 옛 성터일쯤한 곳을 돌아

 

흔들리는 초롱불은 꺼진 듯 보이지 않는다.

 

조용히 조용히 흔들리던 초롱불 …….

-박남수<초롱불>

 

^^감사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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